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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이
024 정예림
복길이를 처음 만나던 날이 아직 생생하다. 1994년 10월 3일. 새벽부터 아빠는 전교인단합대회차 주왕산으로 갔다. 엄마는 내가 따라다니면 징징거린다고, 때마침 송정에 현장학습을 나온 고모에게 나를 맡기고, 마지막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 나는 고모랑 송정해수욕장에서 실컷 놀고 집에 왔다. 골목 앞 슈퍼 아줌마로부터 기쁜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도 동생이 생겼어요!
앞 골목에 사는 남매가 있었다. 셋이서 자주 놀곤 했다. 항상 둘이 편먹고 나를 이겼다. 나도 둘이면 이길 수 있는데… 그때부터 나의 목표는 동생을 만드는 것이었다. 왜냐, 그러면 그 녀석들을 이길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 녀석들이랑 놀고 들어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 아빠한테 늘 동생을 사오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동생은 시장에서 사 오면 되는 줄 알았다.
동생과 처음 마주한 날, 나는 실망했다. 한숨부터 나왔다. 도대체 얘를 언제 키워서 그 녀석들이랑 싸운단 말인가! 누워서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눈 마주치면 꺄르륵 웃는 이 아기를 도대체 …. 아니, 엄마는 큰 애를 사와야지, 왜 이렇게 조그만 아이를 사 왔나 모르겠다. 그렇게 그 아기는 우리 집에 왔다.
아기는 잠이 없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나는 벨도 못 눌렀다. 아기를 겨우 재운 엄마는 혹시나 깰까 봐 나의 행동을 통제했다. 나는 유치원에서 돌아 올 때도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내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어김없이 깼다. 나는 엄마랑 놀고 싶은데, 아기가 깨면 할 수 없이 엄마는 아기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나는 엄마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아빠가 교역자였기 때문에 새벽예배를 빠질 수가 없었다. 엄마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아빠가 새벽예배를 가는 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 녀석이 새벽에 깨어 엄마 아빠가 데려가면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이 녀석과 내가 남아있는 게 문제였다. 남아있으면 꼭 울었다. 기저귀에 문제가 생겼거나, 배가 고프거나, 내가 그 해결을 해야 했다. 6살 아이가 뭘 하겠는가! 문제는 뻔한 곳에서 터졌다.
하루는 녀석이 우는데 기분이 싸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가 올 텐데, 조금만 더 잘 것이지. 힘차게 울어댔다.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무서웠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였다. 수건을 넓게 펴고 애를 눕혔다. 겨우겨우 기저귀는 빼서 처리했는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도무지 바둥거리는 녀석에서 새 기저귀를 해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보라는 나의 말을 녀석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잠에서 덜 깨 짜증이 난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야, 가만히 좀 있어 보라고. 그래야 기저귀를 하지.” 나는 울고 녀석도 울고, 나중에 엄마가 와보니, 큰애는 제 맘대로 안돼서 울고, 작은애는 추워서 울고 있더란다. 그렇게 어린 누나와 아기 동생은 새벽마다 서로 깨지 않길 자기 전 두 손 모아 예쁘게 기도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일이 심각해졌다. 이 녀석이 나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을 탐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숙제를 하고 있으면 책상 위까지 기어올라와 내 손에 쥐어진 연필을 빼앗아 갔다. 교과서에 낙서도 했다. 그러면 나는 숙제를 방해한다고 울었고 엄마는 동생을 업어야 했다. 이 녀석은 업힌 채로 나의 숙제를 방해했다. 똑같은 연필과 공책을 쥐어줘 보았다. 똑같았다. 하지만 자기 손에 쥐어진 것이 내 손에 쥐어진 것만큼 나오지 않자 다시 내 손의 연필을 내놓으라고 울어댔다. 그럼 결국 엄마는 이 녀석을 업고 밖으로 나가고 나는 조용한 집에 혼자 남았다. 조용해서 좋은 게 아니라, 혼자 남아서 좋지 않았다.
그러던 녀석이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6학년, 녀석은 1학년. 우리 학교의 입학식에서는 6학년이 1학년을 업어주는 시간이 있었다. 그날 친구와 반을 바꾸어 일부러 1반에 줄을 섰다. 동생이랑 순서가 맞도록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담임쌤이 오셔서 그냥 동생 찾아가서 냉큼 업으라고 하셨다. 그 말에 냉큼 달려가 동생을 업었다. 이 녀석 언제 크냐고 바꿔오라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커서 자기만한 가방을 메고 학교를 오다니 너무 기특하고 뿌듯했다.
나름 꼬맹이 동생은 나의 자랑이었다. 이 녀석도 자기 누나가 좋았는지 꼭 집에 같이 가려고 했다. 물론 자기 친구들이 학원이다 뭐다 바빠서 놀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1학년 3월은 아이들이 오래 학교에 있지 않는다. 3교시만 하면 집에 보낸다. “신나는 1학년” 시기 말이다. 3교시가 마치면 이 녀석은 학교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논다. 점심시간쯤 되면 친구들이나 학원에 하나둘씩 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6학년 교실로 슬그머니 올라온다. 나와 함께 급식을 먹고 내가 오후수업에 들어가면 이 녀석은 다시 운동장에 가 홀로 놀거나 일찍 마친 2, 3학년이랑 또 놀았다. 그리고 청소시간이 되면 교실 뒤편에서 있다가 같이 가곤했다. 우리 반 애들이 꼬맹이라고 놀려대서 몇 주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집에 가는 걸 좋아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좋은 머리를 유감없이 뽐냈다. IQ132. 그냥 스윽 보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머리에 정리된다는 이 녀석은 우리집의 브레인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다닌 학원에 이녀석도 엄마를 조르고 졸라 같이 다니게 되었다. 나는 저~ 뒷반 (예체능으로 마음을 굳힌 이후라) 하지만 이 녀석은 달이 바뀔 때 마다 앞반으로 올라가 결국 반을 하나 새로 만들 정도 였다. 그러다 더 올라설 반이 없자, 재미없다고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녀석이 서점 가면 꼭 사오는게, 뉴턴지였다. 과학동아는 시시해서 재미가 없다나? 한때 한국영재고를 꿈꾸며 비상하던 이 녀석에게 무용이 찾아왔다.
그냥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져본 이야기였다. 우리 집안은 뼈대 자체가 열린 골반이라 무용하기 딱이다. 여자는 널리고 널린게 무용수니, 니가 하면 성공할꺼다. 그게 다였다. 이 녀석은 그걸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고민을 했더란다. 자기가 공부로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어딜가도 최상위 2프로는 사교육으로 탄탄히 다져져 뚫고 올라설 수 없다. 그럼 무용은? 자기 생각에 무용은 될 것 같았나보다. 녀석은 무용을 배운지 3달 만에 예고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렇게 나는 문턱에서 떨어진 예고 생활을 했다. 발목 두 개가 부러져 고3 한해 휴학을 했다. 철판을 박고 집에서 쉬는 동안 녀석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무용을 포기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무용에 온전히 쏟고 있었다. 그대로 끝내기엔 아직 못해본 게 너무 많다고, 아쉬워했다. 먼저 그런일을 겪어본 예체능 선배로서 마음을 정말 깊이 많이 나누는 1년이었다. 녀석은 독했다. 그 다리로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 갔다.
추운 겨울 진해에서 그는 새로운 출발을 했다. 길이 엇갈려 해군의 시작점 그 대문앞에서 “복길아” 를 외쳤다. 녀석은 들었지만 뒤돌아 볼수 없었다고 한다. “아따 우리누나 소리를 대따 크네.” 하면서 눈물을 참았다고 한다. 그날 그 문을 부여잡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동생에 대한 시기 질투가 많았다. 나이 차가 나다 보니 이상하게 빼앗긴 느낌을 많이 느끼며 자랐다. 나의 사랑을 빼앗아 독차지 한 질투로 가득 찼었는데, 그게 이제 같이 늙다보니 그런지 많이 없어졌다. 오히려 이제는 정말 동반자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은 이 녀석이 5살 위의 오빠 같을 때도 있고, 예비역 아저씨가 된 이후로는 자기가 오빠인 줄 안다.
우리에게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엄마가 예전에 잠시 방황할 때 점, 사주 이런 걸 보러 갔다고 한다. 그때 동생과 내 사주가 딱 전생에 부부였다고 한다. 나는 돈과 여자와 술을 사랑하는 한량이었고, 동생은 그야말로 현모양처의 표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맨날 아내의 속을 썩이고, 그런 아내는 나를 지극 정성으로 공부시키려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생에서는 누나 동생으로 태어나 보살핌도 받고, 전생의 한을 풀라고 누나 동생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여전히 녀석이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고, 나는 부엌 근처로 들어오질 못하게 한다. 늘 챙겨주는 건 녀석이다. 그런 녀석에게 나는 복길이라는 촌스러운 별명까지 붙여주며 ‘복길아~ 물 좀.’ 하며 여전히 부려먹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럼 후생엔 엄마랑 아들 정도는 태어나야 너를 챙기겠다고 하였더니 후생에 또 보냐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래, 우리 이생에서 이렇게 아웅다웅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복길이는 한자뜻이 있는 별명이다. 복 복자에 길할 길자를 써서 한자별명을 지어줬다.녀석이 청소년이 되어서 붙여준 별명이다. 촌스러운 이름이 오래산다고 해서 고심끝에 붙였다. 어린 시절 힘들 때, 외로울 때 늘 내 곁에 있어준 고마운 녀석이다.
남자 친구랍시고 보여준 날, 녀석의 반응을 잊을 수 없다 “눈은 달고 사나, 눈은 왜 달고 사노, 아니다. 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녀석의 정확한 눈썰미는 이별 후 마음을 정리하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누나야, 마음이 너무 아프다. 심장이 뻥 뚫린 것 같다. 남자랑 여자가 만나서 헤어지고, 결혼하고 밖에 선택권이 없는데, 우리는 10대라서 결혼 할수 없어서 헤어지는게 당연한데, 왜 이렇게 심장이 뚫린것 같지”라며 울던 어리지만, 로맨틱했던 녀석이었다.
가끔은 오빠같이 배울 점도 많고, 어리광 부릴때는 정말 우리집 막내 동생이 맞는 것도 같다. 어느 날 부쩍 어른이 되어, 누나를 지키겠다고, 잔소리를 해대는 걸 보면 멋있기도 하고, 좋다.
정말 선물처럼 뿅 하고 나타나, 심심했던 내 인생에 선물이 되어준 너, 지금 내가 재미있게 살 수 있게 해준 너. 네가 내 동생이라 너무 행복하다. O형 누나와 AB형 동생 정말 극강의 도라이 같은 조합이지만 우리 참 통하는게 많고, 교집합이 많다. 우리 더 늙기 전에 유럽 여행가자! 너랑 함께라면 뭐든 할수 있을것 같다.
더 잘되고, 잘되고 잘되길, 더 건강하고 건강하고 건강하길.
원하고, 소원하고, 서원한 꿈 이뤄가길.
너의 입으로 선포한 대한민국 인간문화재 정영현이 되길
누나가 전심으로 응원한다.
늘 고맙고, 사랑한다. 우리 복길이.
그래서, 오늘 집에 오면 라면 끓여 줄꼬양?
서면 한복판에서
그러니까 서울에 비하면 강남 한복판에서
이러고 논다. 우리 복길이
아구구 신나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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