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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024 정예림
오늘은 부모님과 잊지 못할 추억 말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 3대에 관한 잊지 못할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그 주인공은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이다. 우리 할머니의 고향은 울릉도이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잘나가는 집안 둘째 아들이었다. 군대가 가기 싫어 울릉도로 도망을 갔다가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할머니는 기독교 신자였고, 할아버지의 집안은 불교 집안이었다. 그렇게 시집온 할머니는 갖은 핍박을 받으셨고, 할아버지는 쫓겨나다시피 장가를 오셨다. 부산으로 피난 오다시피 내려와 정착하여 어려운 형편에서 겨우 지금 내가 사는 집을 지으셨고, 그렇게 우리는 부산사람이 되었다.
할머니는 이 집에서 아들 둘을 낳고, 딸 하나를 낳으셨다. 시댁의 핍박 속에서도 아들둘을 목사로 길러내셨고, 딸은 사모가 되었다. 그게 할머니의 자랑이었다.
그렇게 아들, 딸 시집과 장가 보내고, 그 아들딸이 아들딸을 낳아, 1+1이 무려 15나 되었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으셨다. 내 기억 속에서도 늘 할머니는 어딘가 한군데는 늘 아프셨다. 고혈압약을 오래 드셨고, 심장이 좋지 않아 서울로 병원에 다니셨다. 내가 어릴 때는 산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나는 산에서 뛰어놀고 할머니는 기도하러 바위에도 올라가시고 그랬는데, 내가 자라면서 잘 따라나서지 않아서 그런지 그런 기억들도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져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프시기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은 할머니 집 아래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아래층 위층에 살면서도 워낙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다보니, 쑥쑥하게 지냈다. 그러다 아빠와 할머니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그 쑥쑥 함은 더욱 커져갔다. 그 사이 미움이 자라났다.
그러다 올봄. 그 잔인한 봄은 나를, 그리고 우리 가족을 그냥 지나쳐 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허리 수술을 받고 퇴원하셨는데, 점점 기력이 떨어지시더니 119에 실려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누가 봐도 위급상황이었다.
MRI 기계 안에서 혼미한 정신으로 검사를 거부하시며 발버둥을 치시는 바람에 검사는 계속 중단되었다. 누군가 잡지 않으면 검사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았다. 가족을 쭉 둘러보는데, 내가해야 할 것 같았다. 고모도, 작은 엄마도, 엄마도, 할머니의 힘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MRI통 밖에서 팔을 쭉 뻗어 할머니의 팔을꽉 잡았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자꾸만 ‘안 간다.’를 말하셨고, 나는 ‘걱정마라, 할머니. 안 보낸다.’로 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속성으로 찍고 나온 할머니는 응급실에서 몇 시간이나 대기했다. 붓고 부은 팔다리에는 혈관이 잡히지 않았다. 여러 번 찔려 혈관이 터져 더 이상 주사 맞을 자리도 없었다. 할머니는 거친 호흡으로 버티고 계셨다. 병실로 올라간다는 소리를 듣고, 볼일을 보러 나갔다.
집에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분명 응급실에서는 별 이상이 없다는 식으로 들었는데,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고 한다. 우리 가족 중 첫 중환자실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그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처음 중환자실 앞에 집결했다. 확실히 중환자실은 무서운 곳 이었다. 할아버지는 걱정에 가득한 눈을 하고 앉아 계셨고, 고모는 울고, 작은 아빠는 그런 고모를 다독이고, 아빠는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느리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전광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 규칙에 따라 2명씩, 차례로 이 대가족이 면회하러 들어갔다. 다행히 할머니는 빠른속도로 회복하셔서 3일 만에 일반병실로 옮기셨다. 마지막 중환자실에서는 가족들 출석체크를 하실 정도로 호전되셨다.
일반병실에서도 빠르게 회복되어 곧 퇴원하셨다. 집에 와서도 2층 계단을 올라가시고, 밥도 드시고 괜찮아 보였다.
상실의 아픔에 허덕이고 있을 그때였다. 다시 할머니가 병원에 가셨다. 좀 아프다 싶어서 외래를 통해 입원하셨다. 워낙 내 삶이 바빠서 이번에도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있었다. 주말에 가야지 하다가 주말이 지났다.
월요일 아침 병원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자마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붙들고 끙끙거리고 계셨고, 할머니는 모든 처지를 완강히 거부하고 계셨다. 그러면서 자꾸만 “물 좀 두가”를 반복하셨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어떤 검사를 하게 될지 모른다고, 물을 마시는 건 안되고, 입을 적시는건 된다고 하셨다. 주치의 선생님은 온 가족을 집합시키셨고, 중심정맥관을 잡아야 하는데, 할머니가 너무 완강하게 거부하신다고 힘들어하셨다. 게다가 할머니는 병실이 아닌, 간호사스테이션 옆의 작은 처치실로 나와 계셨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눈에 보이자 더 어린아이처럼 떼쓰며 치료를 거부하셨다. 결국 가족이 내린 결정은 점심을 먹으러 모조리 사라지는것이었다. 그러면 의료진의 결정에 할머니가 순응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적중했다. 결국 할머니는 중심정맥관을 잡는데 응하셨고, 중환자실로 내려가는것에도 응하셨다. 우리는 밥 숟갈을 뜨자마자 다시 병원으로 소환당했다.
그렇게 의사 선생님의 “한 이틀만 집중적으로 치료도 좀 받고 쉬다 옵시다”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 좀 두가”를 반복하셨다. 그렇게 오후가 되자 온 가족이 집결했다. 할머니의 기력은 뚝뚝 떨어져 갔다. vital sign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저녁이 되자 아빠가 집에 가라고 했다. 동생도 나도 시험 기간이었기 때문에, 집에 가서 시험 준비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잠도 자고 아침에 오라고 했다. “이제 장기전이다. 마음 단단히 먹고, 체력관리 잘해야 가족이 안 지친다. 너네는 집에 가서 내일오고, 내일 올때, 잘 준비 좀해와라”라고 아빠는 장기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온 복길이와 나는 과제와 시험에 2시 넘어 잠이 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왠지 모를 싸한 기분이었다. 몇 년 전에 느낀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닐 거라 생각하고 다시 누웠다. 하지만 달아난 잠은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아무 일이 없길 바라고 누워 있었다. 정신은 점점 더 말똥해졌다. 전화가 왔다. 그렇게 할머니는 영정사진도 하나 남겨놓지 않으시고, 그토록 당신께서 바라시던 천국에 가셨다.
영정 사진으로 쓸만한 사진을 찾으러 2층에 올라갔다. 분명 비어있던 그 집이 처음이 아니었다. 수시로 병원 심부름차 빈집에 왔었는데, 그 새벽의 그 빈집은 다른 느낌이었다.
“할머니! 내 왔다!”
할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집은 대답이 없었다. 현관문 앞 신발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냥 아무 느낌,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냥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와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울음이 터지지도 않았다. 숨 막힐듯한 호흡과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사진 몇 개를 찾았다. 우리 할머니 참, 이렇게 갈 때는 급하게 갈 거면서 그 흔한 장수사진 하나 마련 해두지 않으신 게 서운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기 사진은 그렇게 많이 찍으면서 할머니 예쁘게 사진 하나 찍어두지 못했던 게 너무 후회되었다.
새벽에 급하게 온 비보에 동생을 깨우고, 엄마 아빠의 짐을 대충 꾸려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멍-했다. 그냥 꿈인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작년부터 우리교회에 출석하셔서 우리 교회에서 장례를 맡아 주셨고, 부산에서 나름대로 유가족에 대한 서비스가 가장 좋은 장례식장에서 장례절차를 밟게 되었다.
특실의 유가족 대기실은 시설이 굉장히 좋았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다같이 2박 3일을 집을 떠나본 게 처음이었다. 그 흔한 가족여행 한번 다같이 못했다. 슬픔 가운데 있었지만 콘도 같은 시설에 참 이상하게 나는 여행온 느낌이 들었다. 많은 손님들이 오가고, 할머니를 추억하고, 특히 추모곡을 편집하면서, 참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렇게 열심히 배운 음향편집기술이 이런데 쓰이는구나, 내내 빛을 못 보고, 문서작업만 하던 맥북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맥북은 할머니 영정사진 옆 테이블에서 2박 3일동안 내가 편집한 추모음악을 할머니를 추억하러 온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데 사용되었고, 그중 우리 가족의 마음을 가장 많이 어루만져 주었다.
할머니가 우리 가족에게 전해준 사랑은 대단한 것이었다. 할머니가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 지켜낸 신앙에 대해 가족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할머니의 장례는 기독교식으로 치러졌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끝났지만,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이사. 그래서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닌, 영원을 기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족은 그 영원을 믿으며,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본 친척들이 다들 급하게 가셨다고 우리를 위로해주셨다. 슬픔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훌쩍 떠나시며, 우리 가족에게 처음으로 한방에 모여 2박 3일간 14명이 살을 맞대고 누워 잘 수 있는 추억을 허락하셨다.
삼우제까지는 아니고, 장례 후 3일째 되던날 온 가족이 모였다. 광안리에서 회를 배터지게 먹고는 기장 친척 카페로 넘어가 또 배터지게 먹었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추모관인 영락공원을 향했다. 처음 온 날 보다는 한층 밝아진 모습들로 왔다. 오자마자 내 마음에 찾아온 생각은 “할머니, 그토록 노래하던 천국 좋나! 그래 빨리 가고 싶었나” 였다.
할머니가 가신지 한 달 하고 열흘이다. 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다. 다른 이의 죽음 앞에서 나는 오열했었고, 내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나는 두려웠다. 6년이 흐른 지금까지 가보지 못할 정도로 상실은 나에게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주에 겪은 일은 나에게 상실을 이겨낼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사람은 영원하지 않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사랑해서 만나서 결혼을 하면 나는 그 사랑이 영원하다 믿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인간이 끝남으로써 그 사랑도 끝나게 된다. 세상에 영원한 관계는 없다. 영원한 사랑도 없다. 그저 있을 때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걸 깨닫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많은 눈물을 흘렸고, 많이 아팠다.
우리 가족이 겪는 첫 상실이었다. 할머니가 아프시던 초반에 나는 이미 상실에 대해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닥쳐올 줄은 몰랐다. 논문을 뒤적이며 그 이후 가족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 글을 쓰라는 해결책이 많았다. 자꾸 써서 마음 바깥으로 끄집어 내야 그 아픔과 슬픔이 해소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 이야기를 참 많이 써냈다. 쓰고 또 써도 쓸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래도 또 쓴다. 아직 얼떨떨하다. 할머니의 손때 묻은 고무장갑이 아직 부엌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할머니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성경책이 안방을 지키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고모와 할아버지는 얼른 할머니의 유품을 다 정리했지만, 우리 가족은 아직 서툴게 그 첫 상실을 인정해가고 있다.
부모님과 가족들과 함께한 추억,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기억. 15에서 1을 뺐을 뿐인데 0이 남은 듯한 이 공허함. 우리는 이제 서서히 익숙해 져야 할 것이다. 당장 이번 추석에 이 집을 떠나겠노라며, 고모와 아빠와 작은 아빠가 빠듯한 살림에 곗돈을 모았다. 이번 추석 이집 청마루에 모이면 울기밖에 더하겠냐며, 할머니가 여행가라고 만들어준 기막힌 기회라며, 여행경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 잔인한 봄을 계기로, 우리 가족들의 추억 만들기가 시작되고 있다. 앞으로 더 건강하고, 재미나게 삽시다! 천국에서 보고 계실 할머니 샘내시게!
1+1=15, 15-1=0 우리가족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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